1. 시작하면서
리뷰 쓰는 게 이렇게 어려운 적이 없었다. '구의 증명'을 다 읽은 지는 몇 주 되었지만 아직도 책을 들여다보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예전에 들었던 '미친 사랑의 노래'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노래 가사나 분위기보다는 제목이 구와 담이의 사랑을 잘 표현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중간중간 '미쳤다'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고, 다 읽고 나서는 정신이 멍했다.
단어가 직접적이라 외설적인 단어나 내용이 적나라하게 나오고, 문장이 길지 않다. 근데 문장이 정말 짧다보니 주인공인 구와 담이의 다급한 마음과 그 상황이 더 잘 느껴져서 읽는 내가 숨이 차더라.
슬프고 싶어서 고른 책이라 제대로 골랐다 싶으면서도 이제 그만 좀 슬프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지금도 만감이 교차하는 책이다.
2. 책 소개(스포있음)
구의 증명을 간단히 요약하면 구(남자)와 담(여자)이의 이야기이다.
짧게 이 두 인물의 배경을 설명하자면... 구의 부모님은 돈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아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리고 결국 빌려선 안 되는 고리대금 사채업자한테까지 돈을 빌리게 된다. 심지어 자식인 구를 보증인으로 세워 돈을 빌리는데, 구가 군대에서 제대한 이후에 부모님은 모두 행방불명되어 그 모든 빚이 모두 구에게 넘어오게 된다. 담이는 할아버지와 살았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존재도 몰랐던 이모와 함께 살게 되는데, 이모는 담이를 보살피기 위해 비구니를 그만두고 밤낮으로 무언가를 만들며 돈을 버셨다. 구와 담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였다. 그리고 둘이 크면서 겪는 사건, 사고들이 이 소설의 주요 줄거리가 된다. 중간 이야기 생략하고 결론으로 넘어가면 구는 결국 고리대금 사채업자에게 돈을 다 갚지 못해 맞아 죽는다. 그리고 맞아 죽은 구의 시체를 담이가 집으로 가져와 먹는다. (이렇게 표현하니 소설 내용이 아주 엽기적이네.......ㅎㅎ 이 '식인' 내용 때문에 이 소설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읽다 보면 페이지 상단에 ○ 혹은 ● 이렇게 표시가 되어 있는데, ○ 는 담이 입장의 내용이고 ● 는 구 입장의 내용이다. 위에도 말했듯 문장이 짧고 단어 사용이 적나라하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돼서 지루할 틈이 없다.
3. 책을 다 읽고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120% 몰입해서 훌쩍훌쩍거리면서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물안개가 가득 낀 호수에 오래 앉아있다가 온몸에 습기가 찬 것 같은 멍한 기분이었다. 구의 증명을 다 읽은 지 거의 3주가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 이 소설을 생각하면 혼자 덩그러니 살아갈 담이 생각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읽는 와중에는 구의 인생이 서글퍼서 울었고 다 읽고 소설을 곱씹는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있을, 그러나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담이 생각에 슬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구가 괘씸하다. 본인은 죽어놓고(물론 본인이 원했던 건 아니지만) 왜 담이한테는 천 년을 살아남고 죽으라고 하는 것인지, 왜 자꾸 오랫동안 살아남으라고 하는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떠나보낸 담이는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 텐데... 담이를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게 하는 구가 아직도 싫다.
구의 시체를 먹는 행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 이 소설이 역겨울 수도 있지만 나는 먹는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살아생전 구가 했던 말을 담이 대신 시행해 준 것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 둘의 사랑이 압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담이가 더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담 넌 정말 강한 여자야. 대단해. 멋져.
꼬이고 꼬여 더 이상 풀릴 수 없는 실타래처럼 엉켜버린 둘의 인생은 한 명이 죽어서도 풀리지 않고 계속된다. 구의 무덤 그 자체가 되어버린 담이는 앞으로도 구와 함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덜 외로우려나. 담이의 남은 인생이 조금만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
최진영작가님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과 또 이렇게 우울해지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읽으면 또 몰입해서 울면서 읽겠지... 근데 또 읽으면 한동안 힘들어하겠지... 중독성 있다 진짜...ㅋㅋㅋ
아래는 기억에 남았던 몇 개 부분들.
●
너는 내가 죽기 전에 왔어야 했다. 내가 그것을 바랐다는 걸 죽는 순간에야 알았다.
너를 보고 싶었다.
낡고 깨진 공중전화부스가 아니라, 닳고 더러운 보도블록 틈새에 핀 잡초가 아니라, 부옇고 붉은 밤하늘이나 머나먼 곳의 십자가가 아니라, 너를 바라보다 죽고 싶었다. 너는 알까?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모를까? 네가 모른다면 나는 너무 서럽다. 죽음보다 서럽다. 너를 보지 못하고 너를 생각하다 나는 죽었다. 너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 했다.
●
죽으면 다 끝인 줄 알았는데, 몸은 저기 저렇게 남아 있고 마음은 여태 내게 달라붙어 있다. 저 무거운 몸을 내가 가져가고 이 마음을 담에게 남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마음도 네가 먹어주면 좋을 텐데. 나도 안다. 맑고도 우스웠던 우리의 첫 키스와 그 겨울밤을 떠올리던 또 다른 밤도 나는 다 안다. 너와 다른 우주에서 온전히 기억하고 있어.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억뿐이니까.
기억이 나의 미래.
기억은 너.
너는 나의 미래.
●
담아. 우리를 기억해 줄 사람은 없어. 우리가 우리를 기억해야 해. 스물세 살 봄의 언저리였을 것이다.
○
나는 내가, 너를 좋아지게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근데 그게 안 되잖아. 앞으로도 쭉 안될 것 같잖아.
구의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구의 눈동자는 버려진 아이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네가 있든 없는 나는 어차피 외롭고 불행해.
나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
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흉악범인가. 나는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 식인종인가. 그 어떤 범주에도 나를 완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죽어보지 않아서, 죽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안다. 지겹도록 알겠다. 차라리 내가 죽지. 내가 떠나지. 전화부스에서 서른 걸음 떨어진 으슥한 곳에서 구를 찾아냈을 때, 구의 몸은 상처와 멍으로 가득했다. 눈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코는 뭉개졌고 앞니가 빠져있었다. 아픈지, 많이 아픈지, 나는 묻고 또 물었지만 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구를 끌어안고서 새벽이 오도록 구의 서른 걸음을 상상했다. 죽어가며 간신히 움직인 그 의지를, 뼈와 근육을, 구의 마음을. 어떤 상상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나의 뇌를 꺼내 내팽개치고 싶었다.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
무엇이 구를 죽였는가.
나는 사람이길 원하는가.
●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담에게 꼭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맞고 밟히는데 더는 아프지도, 공포심도 들지 않았다. 놈들을 피해 달리다가 달려오는 차에 부딪혔다. 그러고도 나는 뛰었다. 뛰듯 걸었는지도, 어쩌면 바닥을 기었는지도 모른다. 토사물처럼 뭉개지면서도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내게 놈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튀어봤자 너 하나 다시 잡아오는 건 일도 아니라고. 내가 걷는지 땅이 움직이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두운 길을 헤매다가 공원으로 들어갔다. 공중전화부스를 찾아 수화기를 들었다. 담아. 여기 커다란 나무가 많아. 아주 오래 산 나무가 많아. 담아. 많이 기다렸지. 내가 꼭 가려고 했어. 그런데.